하나님의 섭리와 그 역사의 한 면을 보면서
최근에 출간된 ‘조선에 하나님의 빛을 들고 나타난 여성’, 「닥터 로제타 홀」이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다음 해인 1890년 조선으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씀을 일기에 적었습니다.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로제타(Rosetta Hall)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일하며, 우리나라 여성 근대 교육의 요람인 이화 학당에서 자라나던 1세대 근대 여성들을 이끌었습니다. 영어 수준이 높은 다섯 명을 뽑아 기초적인 의학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영어를 가장 잘하고 총명한 열네 살 소녀 김점동을 조수 겸 통역으로 썼습니다. 김점동을 한국 최초의 양의사인 박에스더로 키웠습니다. 여메레는 보구여관의 보조 간호사와 전도부인을 거쳐 한양 진명여고 개교의 주역이자 총교사로 활동했으며 훗날 평양 진명여고 교장이 되었습니다.
로제타는 의술이라는 근대적 기술을 가지고 치유와 교육, 그리고 전도를 통합한 선교 방식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로 점자를 개발하고 맹인들을 교육할 정도로 개혁적이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일반 학생들과 통합하여 수업받게 할 만큼 시대적으로 앞선 교육자였습니다.
동대문 불드윈 진료소를 세웠고 기홀병원을 시작했으며, 평양 광혜여원과 인천 부인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평양에서 오랜 세월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한 그녀는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리었습니다. 로제타는 평양 선교 중에 남편과 딸을 잃고도 그 고통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뜻을 찾으려 애쓰며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꿋꿋하게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렇게 로제타는 1890년 조선에 첫 발을 디딘 이래로 1933년 은퇴할 때까지 조선인 못지않게 조선 여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사명은 조선 여성들을 신체적 아픔에서 구하고, 교육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해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는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닥터 홀은 비록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살다가 죽은 순교자는 아니었지만 가족을 잃고 자신의 젊음을 복음과 선교를 위해 바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른 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나는 기독교를 믿는다./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C. S. Lewis)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위하여 죽어 양화진에 묻힌 10개국에서 오신 395명에 선교사들의 묘지를 볼 때에 그들의 헌신과 충성은 말할 것도 없이만, 한 동안 한국에서 충성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계속적으로 주님을 섬긴 선교사들도 많이 있음을 새롭게 알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떠오르는 태양 같이 주님이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도 있지만 그 태양으로 만물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일입니다.